[상황 묘사] 언덕을 오르자, 불길이 치솟은 마을이 보인다. 적들의 괴성, 마을 사람의 비명이 들린다.
[선택지]
1. 도와준다.
2. 외면한다.
(1번을 선택했을 경우 -> 주인공이 바로 상황에 개입하며 전투 개시)
(2번을 선택했을 경우)
-> 주인공: 안돼! 나는 무엇을 위해 모험가가 되었지? 이 광경을 외면해선 안돼!
(그 후, 상황에 개입하며 전투 개시)
과거, 현재를 막론하고 스토리 비중이 비교적 높은 게임들을 즐기다보면 상극의 내용이 담긴 선택지가 플레이어 앞에 놓여지는 순간이 있다.
유저는 고민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진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질 않았는가?
아무리 선택의 번복이 가능한 게임 환경이라 하더라도, 일단 멈추게 된다.
현실의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현실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선택을 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그렇게 진지함 / 호기심 /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품은채 선택지를 고르게 된다.
착실하게 멀티 분기를 준비한 게임이라면 이러한 유저의 선택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유저가 고른 선택지가 정답이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게임이 진행되거나 배드 엔딩의 끝이 기다리더라도,
'유저가 게임에 깊게 몰입하고, 고민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모든 게임이 착실하게 멀티 분기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준비된 선택지만 보면 배드엔딩으로 직행해도 이상하지 않을 목록이 보여도,
실제로는 텍스트 몇 줄만 다르게 출력되고 기존의 스토리로 나아가는 게임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달리, 게임은 전지적인 시점에서 상황을 설명할 내레이션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사람이 직접 만들고 준비해야 될 '작업' 영역에 해당된다.
이야기 분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준비해야 되는 텍스트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하고, 이를 보조할 연출도 비례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렇게 준비된 스토리는 한 번 보고 소모되는 휘발성 콘텐츠에 해당된다.
100개의 스토리 분기가 준비되어 있는 게임 1개를 개발하는 것과,
단 1개의 스토리만 준비된 게임을 여러개 개발할 때의 시간과 비용이 비슷하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개발자가 많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애당초, 한정된 자원과 시간으로 게임을 개발함에 있어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둘 필요가 있는지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공을 덜 들여 만드는 콘텐츠는 존재한다.
그 중 자주 지목되는 것이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한 방향의 분기 선택지'일 뿐이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메인 스토리로 이어질 수 있는 '올바른 선택지'를 선호한다.
올바르지 않은 선택지를 고를 않을 수록, 스토리의 끝이 배드 엔딩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배드 엔딩을 볼 경우 - 이전 선택지로 돌아와 다시 플레이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을까 호기심이 가득 찬 나머지,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선택지를 고르는 유저들의 수는 많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모여 '무관한 분기 선택지'에 대한 작업에 소홀함을 보인 사례를 쉽게 발견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된다.
'포기한다' 라는 선택지를 누르면 포기 이후 정처없는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하는 주인공의 디테일한 뒷이야기가 그려지는 것이 아닌,
잠깐 다른 생각했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힘을 내기 시작하는 주인공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유저들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답이 정해져 있는 게임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렇게 만들꺼면 처음부터 선택지를 만들지 않고 그냥 만들면 안되나" 라고 투덜거렸다.
어느 시점부터는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일부러 틀린 선택지 골라봐야 겠다" 라며 기대도 하지 않은채 선택지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게임에서 선택이 가지는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게임세계에서 선택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 마냥 비관적으로 해석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극한의 상황에 놓여있는건 캐릭터이지, 캐릭터를 조종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먼 곳에서 불구경 하는 느낌에 있었던 만큼,
등장인물들의 고뇌를 가볍게 나열해보는 방식도 하나의 접근성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상황을 현실에 가깝게 연출하는 시뮬레이션 기법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놀자고 하는 게임이니 말이다.
암만 공을 덜 들여 만든 콘텐츠라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발전하는 방향이 있다.
잠깐 텍스트 붙었다가 빠지는 정도로 끝나는 선택지라면 깜짝 유머의 소재로 쓰기 쉽듯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에 와서는 유저간 취향의 영역 정도라 말을 끝내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게 된다.
(비주얼 노벨 / 로그라이크 / 공포 / 코어 계열 게임들은 여전히 무게감 있는 선택지를 보여주고 있고 말이다.)
저런 의미 없는, 왜 있는지도 모를 선택지를 만들 시간에, 그냥 더 내용에 집중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들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