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운명은 있어도 정해진 운명은 없어'
모든 엔딩을 다 보고 느낀 점은 딱 저 느낌입니다.
이 백의 소각자라는 작품은 운명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라 생각이 드네요.
주인공이 자신의 집을 떠나게 된 배경도 운명과 관련이 있고, 자신이 잊고 있던 능력을 깨우치고 관리자가 될지 말지를 정하는 것, 그리고 작중 윤지윤이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자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 까지.
'운명' 이라는 단어와 땔래야 땔 수 없는 작품이었던 거 같습니다.
다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이 독특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단순히 운명을 받아드리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닌, 대부분을 미지수로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작중 주인공의 선택에 의해 관리자가 될 지 말지는 선택이 되지만, 그 이외에 것들은 미지수로 남겨 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과연 주인공은 자신의 집에서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혹은 윤지윤은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포기하고 살아야만 하는가 등 운명적 결과를 던져만 놓고 이 작품은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혹자는 이 점을 마음에 안 들어할 수 있고, 그런 의견들 역시 동의하는 바 입니다.
화두만 던져 놓고 해결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흥미로웠습니다. 사람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우리의 인생도 전혀 알 수 없게 흘러가는데, 작중 인물들 역시 미지수의 앞날을 남겨 놓는 것이 상당한 동질감으로 다가와서 좋았습니다.
저 스스로 그들의 운명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았고요.
다만 스토리적인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꼽자면, 후반부의 과도한 몰아치기를 꼽고 싶습니다.
작중에는 주인공의 과거가 주요 떡밥으로 등장하고 그 전말은 알려주지 않은 채 오로지 그 사건만 언급하는 정도로 흘러갑니다. 그런 만큼 과거 주인공의 이야기가 상당히 궁금해졌는데, 후반부 갑자기 그 이야기들이 과도하게 쏟아집니다. 게다가 그 이야기의 깊이도 부족하다 생각이 들더군요.
주인공의 부모님의 죽음과 주인공이 성당으로 맡겨진 이야기 등등 앞서 던진 수많은 떡밥들을 너무 급하게 알려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알려주는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그 안에서 디테일들도 부족하다 생각이 들었고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스토리 분량을 한 장 정도 더 늘려서 세밀하고 부드럽게 떡밥들을 풀어나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캐릭터와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주인공과 히로인 겸 동료에 해당하는 네 명의 캐릭터, 그리고 빌런인 마도익까지 각자가 상당한 혹은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면에 나서는 역할은 적지만 주인공과 성가인의 찰실한 조력자로 나오는 단시민과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경계에 서 있는 민수정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생각됩니다.
스탠딩 일러에서 각각의 캐릭터를 대할 때 감정 변화가 드러나는 것도 좋았고, 특히 작품 후반부까지 성가인이 민수정을 대할 때 다소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후반부부터 유한 표정을 짓는 디테일도 좋았고요.
다만 캐릭터들 중에서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자면, 먼저 윤지윤을 꼽고 싶습니다.
작 중 윤지윤은 자신도 모르게 발현되는 능력으로 인해 죄책감을 가지고 고민하는 캐릭터로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작중 윤지윤의 행적은 다소 아쉽다 생각됩니다. 너무 수동적인 캐릭터로 나오기 때문이죠. 작중 윤지윤은 주인공과 일행들의 조언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 밖에 보이지 못합니다. 그나마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자살을 결심한 장면이고, 그 장면에서 조차 주인공의 설득으로 그 행동을 멈추려 하죠.
결국 작품 내내 윤지윤이라는 캐릭터는 자기 결정 없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밋밋한 캐릭터로 남았던 거 같습니다. 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비하면 상당히 아쉬운 대우입니다.
작중 여러 일들을 겪은 성가인과 단시민 조차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놀랄 정도였고, 빌런인 마도익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납치하려 했을 만큼 상당히 강하고 특수한 힘을 가진 캐릭터였기 때문이죠. 추가로 이런 엄청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도 아쉽다 생각됩니다.
이 작품의 메인 사건이 윤지윤의 능력으로 인한 점임을 고려할 때 윤지윤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을 더 크고 다양하게 보여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듭니다. 오피스텔에서도 윤지윤으로 인해 오염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다방면으로 보여주고, 더 많은 감염자들을 보여주어 윤지윤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능력의 강함과 위험성을 보여 준다면 작중 긴장감과 캐릭터들의 매력을 더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쉬운 캐릭터는 빌런 마도익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캐릭터는 작중 유일하게 매력이 떨어지는 캐릭터라 생각됩니다. 사실 마도익이라는 캐릭터는 등장 분량 부터가 적다보니 캐릭터를 형성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목적이 크게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마도익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는 단시민이 설명하는 '마씨' 가문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 이야기도 폐백을 이용하려 한다가 전부이고요. 이것으로 정확히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난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마도익이라는 캐릭터도 단순히 못된 사람. 말 그대로 '빌런'으로 밖에 안 보입니다. 그저 사건이 생겼을 때 그것에 연관된 한 '빌런' 일 뿐이죠.
약간의 과장을 보태여 말하면, 마도익은 스토리 초반, 중반에 나오는 감염자 1,2 등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보다 조금 더 세고, 조금 더 강한 목적이 있을 뿐이죠. 마도익을 감염자 A로 치환해도 스토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다는 점에서 매력이 많이 떨어지는 아쉬운 빌런이었습니다. 이번 작품 최종 빌런의 역할을 맡은 거 치곤 퇴장도 너무 빨랐기도 했고요. 차라리 DLC가 예정되어 있는 만큼, 살아있는 상태로 DLC에서 이어 등장을 하면 어땠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마도익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덤이고요. 그랬다면, 당장 마도익의 매력은 부족하겠지만, 그 캐릭터 성은 보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게임 플레이와 관련된 부분들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엔딩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류의 여타 다른 게임들과 달리, 단순히 A라는 선택지에 따라 결말이 바뀌는 것이 아닌 수 많은 선택지의 누적으로 엔딩이 결정됩니다. 물론 베드엔딩의 경우 선택지 하나에 따라 갈리지만, 그 외 메인 네 가지 엔딩은 각각의 선택들의 누적치에 따라 결정되는 상당히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이 작품을 관통하는 '운명'과 엮여 상당히 좋았습니다.
흔히들 운명을 말할 때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가 강한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정해지지 않은 운명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 전략이 유효했다 생각이 드네요. 그 순간에 선택에 의해 내 운명이 정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의 운명은 수많은 선택의 누적으로 정해진다 생각합니다. 가령 내가 과거에 이런 선택을 했지만, 현재 나의 선택으로 인해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거 처럼 말이죠.
즉 이 작품은 과거 나의 선택을 만회할 수 있는 상황이 많습니다. 역으로 과거 나의 선택을 퇴색할 수 있는 상황도 많고요. 그런 점이 실제 우리들의 삶과도 비슷하게 보여 좋았습니다. 유일하게 베드엔딩들의 경우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급작스럽게 맞이할 수 있다는 점도 우리들의 삶과 비슷해 좋았고요. 우리 인생을 살펴봐도 아무리 좋은 선택들을 했다해도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경우는 많이 보았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선택한 엔딩을 보는 방법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여러 엔딩을 보려면 노가다가 더 강해졌다는 단점이 생기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중간중간에 주인공을 움직이며 단서를 모으는 이벤트가 몇번 나오는데, 아기자기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중간중간에 환기 시켜주는 역할도 해 준 거 같아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크릿 플러스 버전을 샀을 때 기대할 만한 것들은 충분히 채워졌다 생각됩니다.
여러 비주얼 노벨들과 미연시를 해보았는데, 그작품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최상위권에 들어갈 만큼 높은 수위를 보여줍니다.
계중에는 다른 히로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이 들고 저 역시 동의하는 바지만, 그것은 DLC에서 해결해 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스토리는 성가인을 메인 히로인으로 내세운 만큼 그런 모습을 성가인에게만 집중한 점은 상당히 좋았다 생각 됩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번 작품은 좋았습니다. 다소 아쉬운 전개와 캐릭터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만듦새가 좋았습니다.
추후 나올 DLC도 기대가 되고 다른 히로인들의 이야기도 기대가 되네요. 그리고 마도익의 배후와 관련된 스토리도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때의 빌런들은 더 매력적으로 나오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를 적었지만, 재미있는작품이라 생각이 듭니다.
추후 나올 DLC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좋은 작품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